영상을 만들게 되면서
실향민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어졌다.
그래서 부산에 내려가
어머니와 큰 고모님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싶어
일본 치바에 사시는 막내 고모님을 찾아가서
옛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길고 긴 영화를
만들어갔다.




영화의 제목은
<기억으로부터>이다.
실향민 아버지의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내 이야기까지 담게 되면서
시간이 많이 들어서
완성하기까지 거의 10년이 걸렸다.
런닝 타임 2시간 44분.

그런데 어린 시절의 고향과
38선을 넘어오는 과정,
6.25 언저리의 이야기에는
넣을만한 사진이 없어서
그림을 그려서 넣게 되었다.
그 중에 몇몇을 옮겨 본다.
판화 흉내를 냈다.

*

복숭아 나무들 속에서
할아버지는 평안북도의 지주였다.
땅이 무려 100만 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아버지의 형제는 다섯 명.
아버지가 막내였다.
형제들은 모자랄 것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셨다.
누나 둘은 출가했고
큰 형은 교사가 되어
집을 떠나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바로 위의 형과
작은 누나와 함께 어울려 놀았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땅에 자라는
복숭아가 아주 크고
맛있었다고 한다.



새를 잡아라!
형제들은 학교를 마치면
집에 가방을 던져두고
들로 뛰쳐나갔다.
여기저기 열린 과일도 따먹고
새를 잡기도 했고
또 제기 차기도 하면서
노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부족한 것도 없었고
공부하라는 사람도 없었고
그저 마음 먹은 대로
쏘다니며 놀았던 날들.
막내 고모님은 말씀하셨다.
'그 때가 내 인생의
황금시대였어.'



모든 걸 잃고 남신의주로
그러다 해방이 되고 얼마지 않아
38선 이북에 공산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지주 숙청이 시작되었다.
할아버지의 그 넓은 땅은 몰수를 당했고
그 땅을 일구었던 증조 할아버지는
새까맣게 되어서 돌아가셨다.
교사였던 큰 아버지는
혼자 월남을 하셔야 했다.
그리고 남은 가족들은
모든 재산을 빼앗긴 채
남신의주로 강제 추방을 당했다.



인사도 못한 이별
남신의주로 옮긴 후
가족 회의 끝에 아버지의 형제들은
월남하기로 결정했다.
부모님 보다 먼저 38선을
넘기로 한 것이었다.
서로 다른 역에서 기차를 타서
떨어져 앉아 사리원까지 갔다고 한다.
당시 열 다섯이던 막내 고모는
양시역에서 어머니와 헤어졌는데
주변의 눈이 무서워서
'얘야 잘 살아라', '어머니 잘 계세요'라는
인사도 못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그렇게 헤어진 지 75년.



38선을 넘다
아버지의 형제들은
돈으로 고용한 안내자들을 따라
38선을 넘었다.
여자들은 여자 안내자를 따라
썰물의 바닷가로,
남자들은 남자 안내자를 따라
산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왔다.
청단이란 곳을 거쳐서
당시 38선 아래에 있던
개성으로 갔다.
그 길에서 부모님이 챙겨준 돈을
모두 잃었다고 한다.
피난민을 노린 털이범의
소행이었을 거라고 한다.



유치장에서 일주일
그런데 아버지와 바로 위의 형은
보안대에 잡혀서
유치장에서 일주일 정도 억류되었다.
그래도 운 좋게도 풀려나서
38선을 넘을 수 있었고
개성의 수용소에서
누나들을 만났다.
만약 그때 아버지가 억류되어
넘어오지 못했더라면
나라는 존재는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담배 사세요
그렇게 서울에 도착한 형제들은
후암동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먹고 살기 위해 담배 장사를 했다고 한다.
그러다 아버지는 작은 고모와 함께
미리 월남해서 천호동에서 교사를 하시던
큰 아버지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지 않아
6.25가 터지고 말았다.
형제들은 남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1950년 9월의 부산, 용두산에서 영도 쪽으로  
피난 길은 멀고도 길었다.
어느 날 인민군들이
피난 행렬을 앞서갔다.
그 후로도 꾸역꾸역
남으로 내려가고 있었는데
어느날 후퇴해서 북으로 가는
인민군과 마주쳤다.
미군이 참전해서
전황이 역전된 것이렀다.
형제들은 계속
남으로 내려갔고
1.4후퇴의 피난민들과 함께
부산에 도착했다.
형제들은
정신 없는 피난 수도 부산에서
살아가기 위해 애썼다.
아버지는 열 네 살이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보다
피난 직후의 아버지는
큰 누나들의 집을 전전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누나네 가게 일을 도왔지만
밥만 겨우 먹여줄 뿐
용돈을 주지도 않았고
학교를 보내려고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부산을 떠나
교사를 하시는 큰 형을 찾아갔고
서울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칠 수 있었다.

어릴 적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교회에서 기도하던 아버지가
빛을 보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확인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작은 고모님은
자신이 머물고 있는
김천의 어느 교회에 아버지가 찾아와서
신앙의 길을 가겠다는
마음을 표현했다고 하셨다.
큰형과 지내며
중고등학교를 마친 아버지는
다시 부산에 내려와
신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졸업하지 못하셨다.

자식들을 먼저 보내고
나중에 38선을 넘어오기로 했던 부모님,
그러니까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결국 남으로 오지 못하셨다.


*

<기억으로부터>는
실향민 아버지의 이야기 뿐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진 나의 삶과
또 내 아이가 살아가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긴 시간을 담고 있다.
복잡한 이야기들이 엉켜있어서
만들기 쉽지 않았다.
어쨌거나 2015년 완성해서
오사카에서 상영회를 한 번 했고
부산독립영화제에
초청을 받았다.

과정도 힘들었고
또 편집에 사용한 컴퓨터의 상태도 좋지 않아
다시 들여다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조금 정돈해서
최종본을 만들어 두어야 할 것 같다.
이미지를 손 봐야 할 곳이 있고
나레이션과 음악 녹음은
다시 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여유가 되지 않으니
할 수 있는 만큼 만져서
보관할까 한다.
주말 마다 아주 조금씩
손 보기로 햇다.
 
*

아버지와 고향,
그리고 이후의 삶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던
일본의 고모님도
아흔을 넘긴 지 오래다.
몇 해 전부터는
다리가 불편하다고 하시더니
어제 통화에서는
간간이 의식을 놓친다고 하셨다.
치매의 기운이다.
건강하실 때 다시 한 번
찾아뵙고 싶었는데
가능할지.

2006년 치바를 찾아
인터뷰를 다녀와서 만들었던
그림일기를 올려본다.

보시려면 클릭!







































2022/12/06 16:30 2022/12/06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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