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스터가 한국에서 유명해지기 전에,
부제만 기억나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뉴욕 3부작>이었는데,
어쩌면 그것이 본 제목일지도 모를 일.

뭐, 제목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그 소설의 전체가 중요한 것도 아니다.

거기에 한 아버지와 아이가 나오는데,
아버지는 아이가 바벨 이전의 언어를 말하도록
일체의 사회적인 접촉을 금하고
감금하여 키운다.

문명의 극단이라고 할 수 있는
뉴욕의 한 구석에서 갇힌채 
태초의 언어를 배워야만 하는 아이.

*

어릴적부터 바벨탑의 예화를 듣고 읽어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도대체 그 때의 말이 어떠했을지
상상을 해본적은 없었다.

오스터의 소설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아마도 아주 단순한 모음으로 되어있거나
혹은 거의 자음이 없는 소리가 아니었을까,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서역의 바람결을 들려주는 것 같은
흙으로 구운 당나라의 악기 '훈'의 음률과 비슷하거나
옴마니 밧메훔이거나...


*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와는 다르게 조금 더 원초적인
생각도 들었다.

아이의 말,
아버지가 바벨 이전의 언어를 찾기 위해
만들어갔던 말은
아마도 동물의 소리에 가깝지 않았을까?
 
아이가 갇혀있었다,라는 소설의 맥락 때문에
내게 그런 생각이 들었을까?
그럴지도 모를 일.

*

사실, 그 아버지는 실패했을 것이다.
소설의 윤곽도 세부도 지금 내겐 선명한 것이 없지만
바벨 이전의 언어는 결코 갇혀진 상태에서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오스터가 말하고자 했던
문명의 가장 큰 비극인듯도 하다.

*

또 다른 책의 일부분.

오늘, 전에 사두었던 책을 읽다보니
앞 부분에 말의 기원에 대한 인용이 잠시 나온다.
"인간이 말을 하도록 유도하게 된 최초의 동기는
정서였기 때문에
그의 최초의 발화는 비유(은유)였던 것이다.
맨 처음 생겨나게 된 것은 비유적 어법이며.
진정한 의미는 맨 나중에 발견되도록
되어 있었다"

동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남의 글을 인용을 하고 있었는데,
인간 최초의 그림이 동물이듯
최초의 말도 동물에 대한 비유가 아닐까,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뭐 다 읽지도 못한 책이니
책의 이름이나 저자등은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밝히도록 하자. 독후감을 올리든지)

그런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오스터가 말했던
바벨 이전의 언어가 생각이 난 것이다.

비유적 어법이란
명시적으로 묘사하거나 설명하는 것이 아닌 것은
당연 한 일.

*

바벨 이전의 언어가 어떠했을지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렇지만,
논리적 추론이라던가 논증과는 전혀 별개로
내가 받은 이미지의 점프를 통하여
점점이 이어지는 별자리 그림같은
얼개는 생긴다.

*

동물과 인간이,
너와 내가 나누어지지 않고 
태초의 정감 속에 있던 그 천국.
처음의 정감이 나중의 의미와
결코 다르지 않는 말의 세상.

*

질문이 정확히 제기되면
이미 그 질문은 답을 가지고 있듯,
너의 정감이 정확히 나에게 와 닿으면,
그것이 의미이고 정감이고
울음이고 환호이고
그 모든 것이 되어버리는 말의 세상.

*

그 세상의 대척에 있던 뉴욕,
하나로도 모자라서 두 개씩이나 서 있던 탑은
부서지고 말았다.
종말이면서 시작인 사건이었다.

*

원래 언어는 이미지였고
이미지는 언어였다.
나누어지지 않았고
거기에 천국이 있었다.

너의 말과 나의 이미지가 무엇이 다르랴
나의 이미지와 너의 말이 또 무엇 다르랴.

문제는 분명히 존재한다.
극단이라고 표현되는
태초, 혹은 종말에
지금 우리가 있지 않다는 것.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의 말과 이미지를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

2002. 12. 21




charlie haden / spiritual

2002/12/21 00:00 2002/1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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