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랫동안 사람과 담을 쌓고 살아왔던
제 삶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였습니다.

아빠가 되었으니, 책임감이 생겼다,라던가
그놈 커가는 모습을 보니 즐겁다,라던가...
그런 이야기와는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

이놈이 자라나는 것을 보면서
나는 거꾸로 내 아버지가 어떠했을까,
내가 어릴 적에 어떠했을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되었고
그로써 무언가 깨달아가기 시작했지요.


>


*

제가 칼국수를 만들어 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꼬물꼬물 먹는 모습을 보면서,
너무 이쁘기도 하고
먹는 일에 몰두하는 순수한 식욕에
이상한 애처로움도 들면서
아, 어버지가 어릴 적 내 모습을 보면서
이런 심정이었겠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아래로 딸들만 있는 장남에 외아들인 나에게
아버지는 엄하신 편이었고,
모두가 벌 받을 일이 있어도 대체로 혼자 받았지요.
그러면서 나는
혼자 미움을 받는다는 감정을
마음 속 깊이 가지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신 후,
혼자 고생하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은 더더욱 깊어졌을 것이구요.
어쩌면, 아버지를 미워하면서
어머니 속을 썪이는 불효자인 나를 정당화해온
뒤틀어진 심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손길이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가 아프시면,
손수 밥을 지으셨고 일일이 아이들을 씻기신 후,
내복을 갈아입히셨는데
그때 씻기시던 손길의 부드러움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일이 많으신 어머니는
대체로 뜨거운 물에 박박 씻기셨지만,
아버지는 그러지 않으셨지요.
그리고 그 때의 적당히 미지근한
물의 온도까지도 기억이 납니다.
그만큼 적당히 따뜻한 물의 온도를
나는 결코 맞출 수가 없습니다.



*

제 아이의 이름은 치영(致永).
치영이는 노래 부르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그리고 음악에 맞춰 춤추는 것도 아주 좋아합니다.

돌이 되기도 전에,
TV에서 락큰롤이 나오면
히프를 흔들면서 춤을 추고
R&B가 나오면 어깨와 팔을 흐느적 거리면서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지요.
그 모습을 보면서
자라오면서 뒷전으로 물러나 앉혔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살아나기 시작했지요.

대학시절 대인공포에 시달려왔었고,
동료들은 잘 몰랐겠지만
직장에서도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기피는
오래오래 나를 괴롭혔지요.
그런데 치영이의 춤과 노래를 보면서
어린 날 내가 사람들 앞에서 노래했던 기억,
사람들이 내 노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내가 좋아했던 기억들이
차츰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었지요.
아, 나도 저런 아이였던 것 같다!

비틀즈를 다시 듣게 된 것도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였습니다.

아이가 태어남으로써
오히려 제가 새로 태어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

그러면서 내가 깨달은 바는
아이는 나를 통하여 이 세상에 왔지만
근원적인 곳의 메시지를
내게 들고 왔다는 것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사랑 속에 있다는 것.
그것이 상처에 의하여 잊혀진 것도 같고
어둠에 가려지기도 하지만
근원적인 사랑은
늘 우리를 감싸고 있다는 것.


오늘은 치영이의
다섯번째 생일입니다.



2002.12.23


PS:치영이의 노래와 그에 맞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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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ross the universe / beatles

2002/12/23 00:00 2002/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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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mani 2009/05/24 04:12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영상일기 한편 한편이 역사도 되고 추억도 되고 ~ 소중함을 다시한번 느끼게 되는거 같아요..

    • 마분지 2009/05/25 02:26  address  modify / delete

      그러니 좀 더 잘 만들어야 할텐데
      그리 마음처럼 잘 되진 않네요.
      저는 완결적인 구성에 대해
      조금은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어
      좀 자유스럽지 못하단 기분도 들구요...
      지금은 다른 작업이 있기도 하고
      또 변화가 필요한 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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