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싶은 그림 한 장

from 이야기 2002/12/14 00:00

*

오베르의 교회 그림도 가서 보고싶고,
렘브란트는 정말 보고싶고,
세잔들도 보고 싶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보고싶은 그림이 있다.

*

초등학교 때, 그림을 꽤 그렸던 나는,
미술 대회에 나가면 대체로 상을 받곤 했다.
크레용으로 쓱싹쓱싹...하는 그림이었고
누구보다 빨리 그렸던 것 같다.

어느날 교내 사생 대회가 열렸고,
학교 뒤에 있는 동산에 올라가 모두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날도 쓱싹-그리고서는 스스로 만족한 나는
음~애들이 어떻게 그리고 있나~하는 심정으로
다른 친구들의 그림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뭐 대부분 고만고만한 그림이었고
어쩌면 상은 내꺼야! 하면서
내심 미소를 지었던 것도 같다.
그림을 잘 그리던 몇몇들의 그림으로
보았어도 별로 볼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조그만 아이의 그림을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떤 집을 하나 그린 것인데,
3차원의 구도가 허물어져 있었고
색깔도 그리 이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림이 툭 튀어나와 나를 치는 것 같았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인상파의 그림만을 보던 세상에
입체파의 그림이 튀쳐나온 것 같은
그런 느낌이라면 적당한 표현일지 모르겠다.

까만 뿔테를 쓴 조그만 아이가
햇살에 눈부신듯 나를 올려다 보던
표정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

무엇에 나는 놀랐을까...
형태적인 정확함도 색채의 아름다움도
구도의 안정감도 없는 그림이었다.
그렇지만 그림 속의 집은 힘이 있었고
이상한 불균형들이 마음을 두드렸던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의 그림을 보고
충격을 받다니...

미술 대회는 끝이 나고
그 아이의 그림이 최고상을 받았다.
우리 반 선생님과 아이들은
결과가 이상하다고, 내 그림이 더 좋다고 했지만,
나는 그 아이의 그림이 더 뛰어남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처음으로 누구누구의 그림이
나보다 나음을 인정한 사건이었다.
(사실은 별 잘 그리지도 못하면서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내 그림이 낫다고 우겨대었던
조금은 오만한 아이였을 것이다.)

*

그 무렵부터 그림을 그리지 않던 나는
중학교 들어가서는 미술선생님을 피해
도망다니는 것이 일이 되어버렸다.

하여간 통나무집같은 것을 그렸던 그림과
찡그린 인상으로 올려다 보던 아이의 얼굴은
오래오래, 지금도 내 머릿 속에 남아있다.


                                            이상하게 쉴레의 집그림을 보면
                                            그 친구의 그림이 떠오른다.

*

대학에 들어온 후
방학이면 고향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고향 동네 길을 가다가  그 아이를 보았다.
나의 눈이 잘못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이는 여전히 알이 두터운 뿔테를 쓰고
작업복 같은 것을 입고 길을 걷고 있었다.
공장에서 일하는 아이가 되어버린 것일까...

나는 작업복을 입고
모퉁이를 돌아가던 그 친구의 모습을
떠 올릴 때마다 마음이 아려왔다.
놀라운 그림을 그리던 아이는
공장엘 다니는구나...
별 것도 없는 나는 공부를 한답시고
허송하고 있구나...

*

누구나 어린 시절을 지나며
몇몇 천재를 가진 친구들을 보게 되는데
그런 친구들이 그냥 스러져 버리는 것을
보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

한때,모교사랑 싸이트에
드나들었던 적이 있다.
초등학교 동창들과 가끔 이야기도 나누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 친구의 사진과 이름을 확인하고
동창들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근황을 아는 사람도 없었고
이름조차 기억하는 이가 없었다.

*

그때 어린 나이였지만
사람에게 충격을 주는 그림이 존재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다른 그림들은 시시해졌다.
물론 여러가지 복잡한 감정들이 얽힌
사건들이 있었지만...

*

오랜 시간이 지나서
새롭게 그림들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 그림이 보고싶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그림을 다시 보아야
내 눈이 열리지 않을까,라는
다소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만약에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가볼 기회가 있다면
그 그림을 한 번 찾아보고 싶다.

그리고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그 아이의 표정을 한 번 더 보고싶다.
햇살에 조금 찡그리고 나를 올려다 보며
너 뭘 보니,하던 그표정.


2002.12.14


*그 그림과 전혀 관계가 없는, 치영이의 그림 하나<소방서>




gnossienne 2 / erik satie

2002/12/14 00:00 2002/12/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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