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 하운드

from 이야기 2002/12/06 00:00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것이 1972년이었던가?
당연히 그때쯤 고향 부산에도 고속버스 터미널이 생겼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조방앞이라고 부르는 곳.
'조방'이란 다름아닌 일본인들에 의해 운영되었던 조선방직의 줄임말이다.
지금 고속 터미널은 일찌기 이사를 가서
지금은 거의 시를 벗어나는 지점에 있다.

하여간,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버스는 두 종류였다.
그때만해도 고속버스는 모두 수입차였는데 하나는 벤츠였고
다른 하나는 그레이하운드였다.
벤츠는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그레이 하운드는 우선 차체에 기다랗게 그려진
사냥개 그레이하운드의 모습부터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2층 버스였다는 사실이다.
간혹 미국영화 비디오를 보거나 하면 가끔씩 나오는
기다란 사냥개가 그려진 버스.
그것이 그레이 하운드다.



그 버스를 타본적은 없다.
다만 아주 오래 전에 아버지와 거기를 지나면서 나누었던
짧은 대화가 기억이 난다.
대화라기 보다 아버지의 말이 기억이 난다는 것이 정확하다.
그때 아버지가 한 말은  이것이었다.

"저 버스는 한번도 안쉬고 2천리를 달릴 수 있다."

그 말이 왜 오래도록 남아있었는지 모르겠다.
2천리라는 거리 개념이 내 머리속에 있기 힘든 어린 때였고,
또 다른 자동차들이 얼마를 가기에 그것이 놀랍다는 비교개념도
없었을 때였던 것이다.
아버지의 어조 때문이었을까?
사실 그 말은 아주 건조하게 툭 뱉어진 문장이었을 뿐인데...

그 말 속에 담긴 마음을 헤아리게 된 것은 겨우 수년 전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도 십 수년 후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실향민이었다.
전쟁 전에 형제들만 월남을 하였다.
어머니 아버지, 그러니까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는
자녀들만 보내놓고는 결국은 내려오시지 못하였다.
막내였던 아버지는 초등학교 5학년의 나이였고,
어른 하나 없이,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져가면서
결국은 부산, 그것도 영도에 오신 것이었다.

한 번도 쉬지 않고 2천리를 간다.

아버지의 고향이 부산에서 2천리를 떨어진 곳이었다.
신의주 옆의 용천이란 곳.
단숨에 2천리를 달리는 말을 눈앞에 두고도 가지 못하는 슬픔,
어려 헤어진 부모님과 떠나온 고향에 대한 말못할 그리움.

그 말을 이해하게 된 것은
속으로 아버지와 화해를 하면서였다.
외숙모의 장례식 때였다.
머릿 속의 스크린에 아버지 장례식 때 보았던 꽃이
활짝 피는 것이 보이면서였다.

돌아가신 양반과 화해를 한다는 것이 참
이상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내 속에서 그러한 일을 실제로 일어났다.
그것은 그 양반은 어른이 된 내가 이해를 하게 되었다,라는 것과도
다른 경험이었다.
그리고 따라서 그 동안의 미움과 마음 속의 반목들이
사라져 감도 경험했다.

마음 속의 아버지와 화해를 하자
나는 아버지와 함께 마음 속의 그레이 하운드를 타고
할아버지 댁으로 단숨에 간 것이었다.
그것, 불과 수년전의 이야기이다.

이제는 내 아이가 그레이하운드의 이야기를 듣던
내 나이에 가까워 가고 있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
표정 하나,
그속의 뜻과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는 참으로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다만 그 방법은
머리로의 이해만으로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문제는 오히려 자기의 장벽인 것 같다.
상처와 미움의 장벽.
그것이 허물어지는 데는
조금 다른 이해가 필요한 것 같다.
삶 모두로의 이해
사랑.




 

mona lisa / nat king cole

어릴 때 집에 이 노래가 나오는 LP가 있었다.
냇 킹콜을 좋아하던 아버지의 LP.

2002/12/06 00:00 2002/12/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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