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이맘 때,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영상을 만들어 거기에 올리면서
글도 쓰게 되었는데
그림을 그려서 곁들였다.
종이에 그리면 번거로우니까
포토샵의 몇 가지 툴을 배워
마우스로 그렸다.

*


비탈길의 할렐루야
어린날 고향 교회에서
감동적인 '할렐루야' 합창을 들었던
경험을 떠올리며 그린 그림.
초등학교 때 한 번씩 해보는
검은 칠 벗겨내기 방식을
포토샵의 펜툴로 시도해보았다.
당시에 내가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표현 방식이었다.



달과 울음
아마도 까만 바탕이던 옛 홈페이지
가장 어울리는 삽화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포토샵 펜툴로 검은 색을 벗겨내서
선을 만들다 보니
판화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래서 스스로는 '가짜 판화'라고
부르기도 했다. 



아무씨의 초상
나도 넥타이를 메고
그럴듯한 직장에 다닌 적이 있다.
그 때가 전혀 그립지는 않지만
월급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부러운 일이다.



하나님의 얼굴
두려워하던 형을
수십 년 만에 만난 동생이 말한다.
'오늘 형님을 뵈니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 화해와 사랑의 얼굴,
그것이 신의 얼굴이다.



밤의 기차를 타고
회사를 그만 둔 뒤, 고향에 자주 갔다.
밤 기차, 밤 버스를 많이 탔다.
깊은 밤을 뚫고 가던 열차를 그려보았다.
그런데 이 그림을 보면 이상하게도
조지 해리슨의 <If I Needed Someone>이
머릿속에서 플레이 된다.



비내리는 광시곡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는
금지곡일 때 빽판으로 들었을 때가 가장 좋았다.
숨죽이고 귀를 기울이면
지글거리던 잡음 속에서 솟아나던
비의(秘儀)의 노래.
포토샵에 조금 익숙해지면서
삐뚤삐뚤, 선을 긋기 시작했다.



파란 나비를 보았다
오래 전 코엑스 빌딩 꼭대기에
차를 마실 수 있는 라운지가 있었는데
거기서 파란 나비를 본 적이 있다.
비바람이 제법인 날이었다.
나비는 빌딩 안으로 들어오고 싶었던지
계속 창에 와서 부딪혔다.



어린 날의 라디오
어릴 때 공장이었던 집에는
하루 종일 라디오가 켜져 있었다.
배에서 선원들이 듣던
커다란 진공관 라디오였는데
정말 소리가 좋았다.
다이얼을 조금만 돌려도
전혀 다른 언어의 방송이 나왔다.
영어, 일본어, 러시아어,
그리고 북한 방송도 잡혔다.
홈페이지에 옛 노래들을 올리면서
옛 라디오 그림을 그려서 곁들였다.
라디오가 열어주던
아늑한 세계가 그립다.



그날의 수선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린 상주였던 나는
장지로 가는 길에
장의차를 타고 수선화 화분을 안고 있었다.
그러다 창밖을 보았다.
햇살이 아주 좋았다.
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
날이 좋은 것이 슬펐다.
그렇게 햇살 좋은 밖을 보다가
다시 시선을 거두어
내 무릎 위에 있는 화분을 보았다.
그런데 그 짧은 사이에
수선화가 활짝 피어있었다.
누군가는 죽어서 장지로 가는 동안
꽃이 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우주란 참으로
비정하구나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흘러
그 순간을 다시 돌아보았을 때
그때 우주가 수선화를 피운 것은
낙담한 열 다섯 살 소년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을 보라
'발에 밟히는 풀과 같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와
그 속에서 죽었다.'
십자가 위의 예수
수난절 그림.



방주에 오르는 노아와 동물들
아주 단순한 선으로, 마분지를 잘라 놓은 형태로
방주에 오르는 동물과 노아를 표현.
2003년에 문을 연 회사의 이름도
방주를 뜻하는 Ark.



성자들의 행진
어린 날 봄이 되면
산 위 마을에서 미친 누나가 내려왔다.
골방에 박혀있던 바보 형아가
햇볕 속으로 나왔다.
그들을 그리며 그렸다.



가난을 소유한 자
가끔 가난마저 소유한 사람을 보게 된다.
자신의 삶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멋진 소유물로서의 가난.



우리들의 선글라스
일상적인 사물 속에도 스민
위압의 이미지들 생각하며.



노래 1
왜 '노래'라는 제목을 붙었는지 모르지만
아랍의 시인들에 대한 글을 쓰며
그린 그림일 것이다.
너바나의 <About a Girl>을
함께 올린 것 같다.
잘 어울리지 않는 듯 하지만... 



성일이
국민학교 3학년 때,
지금은 병도 아닌 병으로 죽어버린 짝.
도시락도 싸오지 못하고,
아이들이 뛰어놀 때에도
혼자서 지하 교실의 어둠처럼
가만히 앉아있던.



그 새벽 그는
부활한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지 않았다.
다시 갈릴리로 돌아갔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던
그 곳으로.



어떤 이미지
위압과 폭력을
부드러운 겉모습으로 포장한
대기업의 광고를 보며
그려본 그림.



굿 나잇 지저스
수난절 그림.
커다란 검은 새의 날개가
하늘을 완전히 가려버렸다.



방문자들
작은 사무실을 열고 있으니까
외판원이나 화장지를 파는 노인,
시주하는 스님들이
찾아오곤했다.
커다란 빌딩에서 근무할 때는
결코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
가난한 사무실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감 소녀, 감 할머니
1947년 부모를 떠나
38선을 넘은 막내 고모는
해주에 와서 이상한 붉은 열매를 보았다.
감을 처음 본 것이었다.
고모에게 감이란 것은
어머니를 잃고 만난
이역(異域)의 열매였던 것이다.
긴 세월이 지나 고모는
일본 치바에서 살게되었는데
집 근처 골목에 감나무가 있었다.
이웃들이 잘 따지 않는 감을
고모는 곧잘 따곤 했다.
그래서 이웃들은 고모를
감 할머니라 부른다고 하셨다.
어린 소녀일 때 고향을 떠났던 고모는
지금 아흔이 넘었지만
여전히 이역의 삶을 살고 계신다.
실향 75년.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버지의 손
어릴 적 집이 공장이어서
아버지 손에 기름 때가 묻어 있었다.
일요일에 아버지는
손을 깨끗이 씻고 교회에 가셨는데
가끔 피아노를 치기도 하셨다.
동요를 작곡하신 적도 있다.
그런데 그 악보를 도저히 찾을 수 없다.
몇 소절 멜로디는 기억난다.



바나나
바나나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좀 말끔한 선으로 바나나를
그려보고 싶었다.



단어들
이명박 정권이 되면서
'서민'이라는 단어가 남발되었다.
시민, 혹은 국민들의
계층을 갈라 나누는 용어가
공공연하게 쓰기 시작했다.



나무 아래의 남자
할 일이 많았지만
웅크리고 있는 시간이 길었다.
그러면서 중요한 것들을
많이 놓쳤을 것이다.
하지만 어떡하겠는가?
내가 그정도의 사람인 것을.
저 웅크린 포즈는
이중섭의 그림에서
가져왔다.


 
Finger Gun
많은 것과 부딪혔고
많은 이들을 거스른 나날이었다.
참으로 쉽지 않은 시간이었다.
어리석은 사람이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그러니 마음도 힘들었다.
아떤 이들의 말은 때로
위의 그림처럼 느껴졌다.



나무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
어느 날 출근 길에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과
동남아시아에서 온 사람이 함께
나무 아래에서 일 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의 모습을 그렸다.
이런 스타일로 그림을
좀 더 그리고 싶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

어릴 때 아무데나 낙서를 해대는 아이였다.
지금도 그림을 많이 그리면 좋겠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는 생활이다.
홈페이지에 삽화가 필요했기에
이나마 그렸을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은 정말 좋다.
그림을 그리는 동작과 그려지는 선 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완전한 몰입의 시간이다.
그런 시간을 좀 더 가지고 싶다.
그리고 제대로, 잘 그려보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앞으로도 쉽지 않을 듯.

서툰 도구로 휘리릭 그린
72dpi의 작은 그림들.
다시 들여다보니
그때의 정감과 생각이 살아난다.
지지부진한 날들이었지만
그 속에서 생겨난,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비록 작은 것들이지만
그것들에 의지해서 조금씩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2022/11/18 14:00 2022/11/1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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